2020년에 선보이기로 예정되었던 새로운 디자인의 20달러 지폐는 트럼프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보기 어렵게 됐다. 지난 5월 재무장관이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20달러 지폐 앞면의 인물 교체 계획을 6년 연기하겠다고 처음 언급한 이후 최근 일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표면적으로는 위폐(복제) 방지 기술과 관련된 문제라고 설명했지만 뉴욕타임스 취재 결과 지폐 디자인은 2016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듯 하다.
누가 왜 바꾸려고 하나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지폐는 20달러짜리. 오바마대통령 임기 말기에 앤드류 잭슨 대통령 얼굴이 그려져 있는 20달러 지폐의 인물을 해리엇 터브먼 이라는 흑인 여성으로 교체하기로 결정하여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 애초에 재무부는10달러 지폐의 디자인을 바꿀 계획이었다. 2015년 당시 새로운 디자인에 들어갈 얼굴을 공모하면서 후보 자격 요건에 대해“미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한 챔피언”으로 반드시 여성이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의 투표권 확대가 이뤄진 수정헌법 19조가 제정된 지1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 현재 10달러 지폐의 모델은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하지만 뜻밖의 반발이 거셌다. 어떻게 미국 지폐에서 초대 재무장관을 뺄 수 있느냐는 항의가 쏟아졌다.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가운데 한 사람이며 카리브해 섬에서 가난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10대에 미국에 온 이민자다. 게다가 그즈음 해밀턴의 삶을 다룬 뮤지컬이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해밀턴의 얼굴을 미국을 상징하는 지폐에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를 이끌었던 버냉키 전 의장은 해밀턴이 “의심의 여지없이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혜안을 가진 경제정책가” 라고 평가하며 기존의 지폐 인물들 중에서 누군가를 빼야 한다면 앤드류 잭슨 전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지목했다. 반면 중앙은행을 만드는 데 대해 부정적이었던 잭슨을 “매력적이지 못한 자질을 가진 대통령” 이라고 폄하했다.
미국의 7번째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재능과 야망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동부의 정치 엘리트들을 이기고 최초로 서부 출신의 대통령이 되어 19세기 초에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강력한 노예제도 지지자였으며 원주민 인디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중앙은행 운영과 지폐 사용을 반대하기도 한 지폐와는 거리가 먼 전력으로 해밀턴 대신 잭슨 대통령을 빼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논란 끝에 재무부는 원래 계획한 10달러 지폐 대신 20달러 지폐의 인물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여성들은 2015년 비영리단체 ‘Women on 20’ 를 조직했다. 백인 남성뿐인 미국 지폐 도안을 바꾸자는 운동이었다. 우먼 온 투엔티는 자체 선정한 후보 15명 중 시민 투표를 거쳐 터브먼을 새 지폐인물로 선정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우먼 온 투웬티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성 참정권 100주년인 2020년부터 터브먼의 모습을 담은 20달러 지폐를 발행한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터브먼이 잭슨을 내쫓았다” 고 표현했다.
해리엇 터브먼은
메릴랜드 주 도체스터 카운티의 한 농장에서 노예 2세대인 해리엣 그린과 벤 로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는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에게 ‘사냥’ 을 당해 강제로 미국에 끌려온 흑인이었고, 부모에 이어 해리엇까지 노예 신분이 이어졌다. 해리엇은 29살에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도망쳤다. 이후 북부의 백인 일부와 탈출한 흑인들이 만든 비밀조직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차장”이 되어 그녀의 가족과 친지를 포함 300여 명의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다. 백인이면서 과격한 노예 해방론자 존 브라운은 터브먼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여성 참정권을 위해 헌신했다.
해리엇 터브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면 칼데콧 수상작인 <Moses: When Harriet Tubman Led Her People to Freedom, Carole Boston Weatherford, 2006> 를 추천한다. 한국어로는 <모세 : 세상을 바꾼 용감한 여성 해리엣 터브먼>이다. 책 제목은 터브먼이 노예들의 모세라는 별명에서 빌어왔다.
당시 재무부는 20달러 지폐의 인물 교체와 함께 10달러 앞면 인물로 알렉산더 해밀턴을 유지하고 뒷 면은 기존의 재무부 건물을 빼고 여성 참정권 운동가 5인- Elizabeth Cady Stanton, Lucretia Mott, Susan B. Anthony, Alice Paul, Sojourner Truth-의 얼굴을 추가하기로 했다. 또 5달러 짜리 지폐 뒷 면에는 석탄 장수의 딸로 태어나 세계적인 성악가이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한 메리언 앤더슨(Marian Anderson)을 비롯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와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의 모습을 넣기로 결정하고 여성 참정권 보장 10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이들 지폐 3종의 최종 도안을 확정해 발표하기로 했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2016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경선 후보는 NBC <투데이>에 출연해 “앤드류 잭슨 전 대통령은 미국에 엄청난 역사를 이룬 사람”이라면서 “20달러 지폐 인물 교체는 무지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고 비난했다. 또 “지폐인물 교체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인종·성 차별을 하지 않는 것)에 따른 결정”이라면서 터브먼은 2달러 지폐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독립선언문 초안 작성자이자 제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그려져 있는 2달러 지폐는 현재도 통용되기는 하지만 2003년 이후 발행되지 않고 있으며 화폐로서의 기능 보다는 행운의 부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앤드류 잭슨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애 인물로 백악관 집무실에 잭슨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걸어 놓을 정도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트럼프대통령은 지폐 디자인 교체 계획을 백지화하려고 하지만 참모들과 장관이 후폭풍을 염려하여 임기 말까지 연기하는 편법을 선택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므누신 재무 장관은 청문회 자리에서 “위조 문제 때문에 새로운 20달러 지폐는 2028년 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며 새 지폐 인물이 누가 될지도 2026년까지 공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임기는 2025년 1월 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