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달 동안 한국 뉴스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가족들 이야기로 수십 만 개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 타겟은 딸의 입시와 관련된 의혹이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미뤄두고. 한국에서 학교를 마쳤지만 학부모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최근의 한국의 입시제도가 궁금해졌다. 일단 논란이 되는 2009년 당시는 이명박정부가 미국의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해라고 한다.

정의는 이렇다.
입학 사정관(入學査定官, Admissions Officer) – 대학에서 다른 행정 조직으로부터 독립하여 입학생을 선발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직업이다.

미국에서는 입학사정관제라고 따로 부르지는 않는다. 이전의 한국 대학 입시 제도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단어로 그냥 미국식 입시제도를 베꼈다고 이해된다. 미국의 입시 또한 한국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바뀌어 왔다. UC 버클리 사회학과 제롬 카라벨 교수는 20세기 전후 하버드대와 예일대, 프린스턴대의 신입생 선발제도 변화와 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특권집단과 소수계의 공존의 방식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책 <The Chosen : The Hidden History of Admission and Exclusion at Harvard, Yale, and Princeton, 2005> 와 대학입시 비리를 탐사 보도하여 퓰리처상을 수상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대니얼 골든 기자의 기사와 책을 바탕으로 미국 대학입시 제도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초기의 입시제도

1920년 대 이전의 HYP는 학문적으로 우수한 아이들을 선발했다. 학업성적을 기준으로 선발했는데  입학지원자는 당해 대학이 치르는 학과목에 근거한 입학시험에만 합격하면 되었다. 입학시험은 학교가 자체적으로 관장했다. 그 시험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로톤 같은 예비학교에서 웬만큼 공부한 학생이면 거의 쉽게 합격 할 수 있었다. 혹시 불합격을 하더라도 몇 번이고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주로 동부지역 상류층 자녀들이 진학을 해서 그들만의 인맥을 쌓는데 주력하던 시기 칼리지 학생들은 학문보다는 스포츠와 클럽활동을 통한 사교생활에 더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하버드의 특정 클럽에 올해 누가 선발되었는가가 지역신문에 대서 특필 되기도 했다. 그러다 1920년 전후 소규모 백인 특권 집단 그들만의 리그에 침입자들이 나타났다. 유대인이었다.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면서 시작된 미국으로의 이민행렬은 1914년 120만명이 넘는 이민자들의 러시로 정점을 찍었다. 급격한 이민자들의 유입은 반이민 정서도 함께 키웠다. 주 타겟은 유대인. 1900년대 ‘컨트리 클럽’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프린스턴대학의 카톨릭교도와 유대인 학생은 모두 합쳐 5%였고, 대규모 이민 인구가 사는 도시에 위치한 예일대학의 1908년 가톨릭과 유대인 학생은 15% 였다. 하버드의 경우 1900년 신입생의 7%가 유대인이었으나 1909년에 10%, 1915년 15%, 1922년에는 21.5%에 달했다. 다른 학교들도 비슷한 수준으로 유대인 학생들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카라벨교수는 이 시기 주로 일류 사립학교 출신 백인들로 채워졌던 칼리지들이 급성장하는 유대인 학생들의 존재에 “당황”했다고 표현했다.

떨어뜨리기 위한 아이디어

인구 증가에 따라 대학 진학 수요 역시 폭발적으로 커졌다. 이와 함께 사립 예비학교의 전유물이었던 명문대 입학 조건(라틴어, 그리스어 수업 등)을 갖출 수 있는 공립학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의 제한된 시설때문에 입학생 수를 임의적으로 제한해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는 떨어뜨리기 위한 아이디어, 정확하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학생들만 뽑을 수 있는 규칙 찾기에 몰두한다. 미국의 건국 정신인 ‘평등’을 해친다는 비난을 듣지 않으면서도 미래에 학교 위상을 높여줄 확률이 낮고-상류층이 아니고, 등록금 수입이 대부분이던 학교에 거액을 투척할 수 있는 기부자들과 졸업생들이 달가워 하지않는 존재-유대인을 정당하게 떨어뜨릴 수 있는 묘책이 필요했다. 백인 프로테스탄트 상류계급이 증가하는 유대인 문제에 대응하고자 고안해낸 새로운 제도는 전통적인 학업성적 위주의 신입생 선발 관행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학생 선발의 기준이 학업성취도에 바탕을 둔 객관적인 기준에서 비학문적인 것에 근거한 주관적인 기준으로 이동했다.

1926년 하버드는 새로운 입학제도를 확정했다. 신입생 정원을 1,000 명으로 제한하며, 유대인과 공립학교 학생들을 불러 모으는 ‘1~7등 제도’를 부분 폐지하고, 유대인 학생을 구체적인 설명없이 단지 거부하는 방법으로 15% 또는 그 이하로 줄이며 이 모든 과정에 대해 학교측은 어떤 지원자에게도 자세한 설명을 하지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은 앞서 시행해온 시험에 근거한 시스템보다 훨씬 복잡했으며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하는 관료적인 기구를 필요로 했다. 1910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국 최초로 입학관리처 (Office of Admission)를 설치했는데 이 기구를 만든 것 역시 ‘유대인 문제’에 직접 대응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의 직접적인 상속과 함께 명문대 졸업장은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변형된 특전의 주요 전달 수단이다. 학생선발과정은 입시에 관련 있는 이해집단들의 정치적 과정이 된다. 이 시기 하버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명문 대학들의 새로운 입시 정책은 학업 성적은 우수하나 ‘부적절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지원자의 배제를 허용했으며 입학관리처장에게 학업성적은 취약하나 훌륭한 배경을 가진 지원자를 입학 시킬 수 있는 폭넓은 재량권을 주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 모든 과정의 시금석 역할을 하는 것이 ‘고상한 품격’ 이라는 메리트로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부족하지만 상류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는 거의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자질로 간주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은밀한 차별 시스템

카라벨이 서술한 1920년대 채택된 대학입시 제도는 이렇다.
“입학지원자 중에서 유대인을 찾아 내는 방법을 고안해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미국 대학 사상 처음으로 지원자는 인구통계학적 정보, 자기 소개서, ‘지도력’을 입증 할 수 있고 ‘품격’에 대해 어떤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과외활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은 긴 지원서를 기입해 제출하게 되었다. 새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항목은 특히 주요 예비학교의 동문과 교장 또는 교사와 같은 신뢰할 만한 출처의 사람들이 쓴 개인 추천서였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이들인지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언변, 복장, 행동거지, 신체적 외모는 물론 출신배경과 양육에 관한 중요하지만 감지하기 힘든 지표를 평가하기 위한 개인 면접을 해야 했다. 최종적인 입학허가 여부는 대개 입학관리처장 또는 입학허가 업무를 위탁받은 동문에 의해 결정되었다.”

1920년대 새로 고안된 학생 선발 제도의 특징을 두 단어로 정리한다면 ‘자유 재량’ 과 ‘불투명성’ 이다. 은밀한 차별을 목적으로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기준으로 변화된 신입생 선발제도는 이후 약간씩 수정되어 왔지만 큰 골격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 대신 아시안을 넣으면 최근 명문대 입시와 관련된 소송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제롬 카라벨 교수의 또다른 유대인 연구에 따르면 유대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고 나서야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학생 선발 과정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멈췄다고 한다. 미국의 입시제도, 무턱대고 적용해서 쓸 만한 좋은 제도는 그닥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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