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분노에 관한 책입니다.

알라딘: 괴물들이 사는 나라

표지모델은 역시 제목과 어울리는 괴물이 맡았네요. 그런데 괴물의 자세가 심상치않죠. 괴물주제에 뭔가 사색??에 빠진듯합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화가 얼마나 났는지 알 수 있는 이름을 가진 맥스라는 아이입니다.

맥스도 맥스 엄마도 화가 잔뜩 났습니다.뭐 흔한 일이죠? 맥스의 방은 나무들이 자라서 숲이 됩니다. 분노의 나무가 무성해진건데 이 부분이 참 좋아요. 분노를 시각적으로 표현할때 대부분 불의 이미지를 많이 쓰죠. 모든것을 태워 소멸시켜버리는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표현하는데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샌닥은 화염의 불구덩이가 아니라 약간 칙칙하긴하지만 그래도 녹색의 숲을 만들었습니다. 초록색과 숲은 파괴적인 심상과는 약간 거리가 있죠?

자신의 이름이 붙은 배를 타고 오랜 여행 끝에 맥스가 만난 것은 눈알을 뒤룩대고 이를 갈며 으르렁대는 괴물들입니다.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묘사한 듯한 이 괴물들은 맥스의 분노한 자아같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건 맥스가 이 괴물들에게 압도 당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왕이 되어 그들을 지배했지요. 주도권을 잃지않았습니다. 마치 카니발같은 한바탕 광란의 파티를 벌인 후, 쓸쓸한 표정의  맥스를 볼 수 있습니다. 표지모델 괴물과 비슷하네요. 이 괴물의 발만 사람의 발과 닮은것도 눈에 띕니다.

환상이 이 책의 핵심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바로 엄마입니다. 작가의 초기 스케치에서만 존재할뿐 책에는 끝내 등장하지않지만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날 엄마는 그냥 기분이 나빴다네요. 그래서 아들의 장난을 더 참기 힘들었나봅니다. 기분이 좋았다면 아니 여유가 있었다면 늑대옷을 입고 설치는 아이를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지요. 늑대옷을 입었다는건 작정을 했다는 뜻이거든요. 화를 내고 벌로 저녁을 굶기고 방으로 올려 보냈지만 아마 금세 후회를 했을것 같아요. 그래서 따뜻한 식사를 손수 맥스의 방까지 가져다 주는 친절을 가장한 반성의 태도를 보입니다. 맥스가 괴물들의 나라에 머물던 같은 시간, 어쩌면 엄마도 엄마의 배를 타고 어디론가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책 뿐만 아니라 ‘깊은 밤 부엌에서’ 그리고 마지막 작품 ‘나의 형 이야기’ 등 모리스 샌닥의 작품들이 프로이트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아이들 혹은 어른의 내면의 무의식적 상징들을 매우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착한아이가 되는지같은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솔직한 속마음을 샌닥만의 감각으로 표현을 했는데, 그림체가 화사하게 예쁘진않아요. 이 책이 나왔던 1963년의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하다며 질색을 했다네요. 물론 엄마한테 대드는 아이도 아이를 굶기는 엄마도 못마땅해했고요. 그러다 이듬해인 1964년에 칼데콧상을 수상하고 나서야 좀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잡아먹겠어 가 아닌가 싶습니다. 맥스가 한번 그리고 괴물들이 한번 똑같은 말을 하는데 맥스의 말은 엄마한테 대드는 느낌이라면 괴물들의 말은 좀 이상해요. 가지말라고 사랑한다고 질척거리면서 잡아먹겠다고 하죠. 집착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좀 이상한 느낌이죠? 저는 이 말이 두개의 의미를 가지고있지않나 싶어요. 프로이트 관점이라면 구강기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실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배경입니다.

샌닥의 일가는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유태인들입니다. 샌닥이 어렸을때 친척들이 어린 샌닥을 귀여워하며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먹어버리겠다고. 아가의 발이나 손을 입에 넣어 본 적 없는 분들은 아마 이해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네요. 대신 우리는 입이 아니라 눈에 넣는다고 하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내 새끼. 이러잖아요. 너무 사랑스러우면 입으로든 눈으로든  내 몸 안에 넣고 싶어하는 것이 본성인가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맥스가 엄마에게 대꾸한것이 다시 보였어요. 어쩌면 맥스는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거부당한거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거나 억눌릴때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생깁니다. 주로 가족들이 그렇죠. 이것을 샌닥이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했어요. 권위에 눌리고 때로는 거부당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샌닥이 알아주는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저처럼 꼬치꼬치 따지지않아도 애들은 그냥 딱 알거든요.

모리스 샌닥은 자신이 줄곧 집중하고 있는 주제가 아이들의 생존이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보면 샌닥은 아이들이 자신을 위한 단순한 생존 그 이상의 회복력에 공을 들입니다. 실망, 상실, 파괴적인 분노에서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입니다. 맥스가 자신의 방으로 보내진 후 자신의 무력감이나 엄마에 대한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이 본능적이고 야생의 것을 다스리는 왕이 되는 상상이었으니까요. 괴물로 표현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난 후에 비로소 엄마가 그리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심리학적으로 다양하게 분석한 내용들이 많아서 또 다른 재미가 있는데요, 샌닥은 과연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정신분석학의 토대에서 작품을 썼을까요? 공개적으로 어디서도 그런 얘기를 한적은 없습니다만 주변인들의 이야기에서 본인이 직접 치료 차원의 정신분석을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와 무려 50년동안 함께 지낸 연인이 정신분석학자였어요. 샌닥은 2008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커밍아웃을 했죠. 샌닥은 늘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느낌을 찾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는데 정신분석학적 지식이 아주 없었다고는 생각되지않네요. 심리학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괴물들이 사는 나라는 그림책의 큰 흐름을 단번에 바꿨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랑 이 책을 함께 본다면 구구절절 이런 얘기는 하기 어렵죠. 대신 두 가지 정도는 함께 이야기 하면 좋겠어요. 첫째는 화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요. 엄마한테 혹은 친구에게 화날 수 있잖아요. 언제 화가 났었는지, 화가 나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런 대화 나눠보는거에요. 대신 화날땐 참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하는거야. 이런 얘기는 마시고 그렇구나. 그럴때 화가 나는구나 났었구나. 이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혹시 최근에 아이에게 화낸적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해를 구하거나 사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요. 두번째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상상하는거죠. 상상력이 아이들을 구원한다잖아요. 책에선 숲에 사는 괴물이었지만 깊은 바다를 누비는 물고기 괴물이나 우주괴물도 있을 수 있고 아이들이 마음대로 상상하는 괴물과 그들의 나라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이 즐거울겁니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책 안보신 분이라면 한번쯤 펼쳐보세요. 영화도 있긴한데 그건 그냥 그렇더라구요. 아이들이 있어서 집에 책이 있다면 아이들없이 혼자서 조용히 다시 보시면 또 다른 느낌과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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